한여름의 열기가 점차 잦아들고, 저녁 바람 속에서 선선한 기운이 묻어날 때. 음력 24절기 중 가을의 두 번째 절기인 ‘처서(處暑)’가 찾아옵니다.
태양의 황경이 150°에 이르는 시점인 매년 8월 23일경으로, 한자 그대로 ‘더위가 머물 곳을 잃고 물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더웠던 여름이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길목으로 볼 수 있는데요, 기상학적으로 계절이 바뀌는 증거를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처서의 과학, 더위와 이별하는 기상학적 신비
처서 무렵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대기의 흐름입니다.
여름 내내 한반도를 지배하던 뜨겁고 습한 북태평양고기압이 서서히 약해지고, 우리나라 북쪽에서 차고 건조한 대륙고기압이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두 기단이 힘겨루기하며, 낮에는 여전히 햇볕이 강해 덥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큰 일교차가 나타나는데요,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선선함을 우리는 흔히 ‘처서 매직’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문학적으로도 변곡점이 드러나는데, 처서 무렵 태양의 남중고도는 약 65º 안팎으로, 하지 때(약 78º)보다 낮아져 햇볕의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집니다.
낮의 길이 역시 하루가 다르게 짧아져, 서울 기준으로 하루해가 약 13시간 남짓만 머물게 됩니다.
이로 인해 대기와 지표가 받는 에너지가 줄어들고, 야간의 복사 냉각이 활발해지기 시작해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라는 말처럼 처서 이후에는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을 체감하게 되죠.
또한, 처서는 연중 강수량이 줄어들고 맑은 날이 늘어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여름철 내내 발달했던 강한 대류활동이 약해지면서 국지성 소나기보다는 하늘이 맑아지는 날이 많아집니다.
이는 천문학적으로도 중요한 변화를 의미하며, 본격적인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처서 매직’, 통계로 보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같은 ‘처서 매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에는 ‘처서 매직’이라 불리던 기상 특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막바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태풍이나 가을장마가 겹치면서 집중호우가 발생하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는데요, 특히, 처서 이후에도 더위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열대야 발생 통계에서 더욱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 2000년대(2000~2009) 10년간 처서 이후 열대야 발생 일수 합계는 4일이었으나, 2020년대(2020~2024) 5년간의 합계는 19일로 크게 늘어났는데요, 이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더운 날씨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비율로 봤을 때, 서울의 경우, 2000년대에는 전체 열대야의 평균 3% 정도만 처서 이후에 발생했지만, 최근인 2020년대에는 이 비율이 평균 14%로 급증했습니다.
'대프리카'라 불리는 대구 역시 ‘처서 매직’의 쇠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대구의 경우 2000년대에는 전체 열대야의 평균 6%였던 비율이 최근인 2020년대에는 13%로 두 배 이상 치솟았는데요, 이는 다른 내륙 도시인 대전(2000년대 7% → 2020년대 10%)과 광주(2000년대 7% → 2020년대 11%)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5년 사이에는 보통 열대야가 많이 나타나는 대구나 광주 등의 남부 지방보다 서울 지역의 열대야 일수가 더 많아진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기후 패턴이 기후변화로 인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처서'는 더위가 물러가는 시점이라기보다, 늦더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하는 새로운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은 옛말?
기후가 달라지면서 속담도 더 이상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은 통하지 않는 걸까요?
길게 이어지는 폭염으로 모기 개체수가 주춤하는 대신 벌이 늘어나고 공격성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벌은 기온이 높아지는 여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요, 올해 더위가 일찍 시작되고 폭염이 오래 가면서 개체수가 증가한 것입니다.
소방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7~9월 벌집 제거 출동이 54% 증가했으며 벌 쏘임 환자 이송도 매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주로 주택가 인근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며, 벌 쏘임 환자는 산·논·밭에서 가장 빈번하다고 하니 야외 활동을 하실 때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벌집이 보이면 접근을 금지해야 하며, 야외에서 음식과 음료를 섭취할 때 가급적 뚜껑을 닫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쓰레기통 근처나 과일나무 근처에 벌이 집중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직 이른 가을, 꽃길에서 먼저 만나는 계절
비록 과거와 같은 ‘처서 매직’은 희미해졌지만, 마음만은 이미 가을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이맘때, 가장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가을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