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끼엠 호수 한가운데 자리한 옥산사. 중국과 베트남 문화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다. GETTYIMAGES
베트남 수도 ‘하노이(Hanoi)’는 처음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낯선 듯 익숙하다. 오토바이 소음에 섞인 길거리 음식 냄새, 허름한 건물 벽에 기대 서 있는 노인들, 어느 거리에서나 들리는 베트남 전통 악기의 선율. 번잡한 도시에서 역설적으로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현대화 속도를 다 따라가지 못한 듯한 하노이는,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속도를 늦추고 골목으로 들어설 용기만 있다면 이곳은 우리에게 시간이 선물하는 기억을 보여준다.
하노이는 천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원래 명칭은 탕롱(Thaˇng Long). ‘승천하는 용’이라는 뜻으로, 11세기 리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찬란하던 왕조의 흥망성쇠가 겹겹이 쌓여 도시는 마치 고색창연한 책장을 넘기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현재이자 과거이며, 아시아와 유럽이 겹쳐진 경계이기도 하다.
전통 상점과 현대식 카페가 좁은 골목 안에 함께 자리한 36거리. GETTYIMAGES
11세기 리 왕조 수도로 시작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하노이 상징인 호안끼엠(還劍) 호수.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이 작은 호수는 조용히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이름은 레러이 왕이 호수에서 거북신에게 검을 돌려줬다는 ‘환검(還劍)’ 전설에서 유래했다. 호수를 따라 걷다 보면 가운데 자리한 작은 섬과 그 위에 세워진 옥산사에 이른다. 중국과 베트남 문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사원은 한낮보다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에 더 아름답다. 붉은 테훅교는 나뭇결과 채색의 따뜻함이 오래된 도시의 품을 닮았다.
구시가지(Old Quarter)의 36거리는 하노이를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좁은 36개 거리로 이뤄진 지역으로 전통 상점과 현대식 카페, 고물 라디오를 파는 가게와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숙소가 좁은 골목 안에 함께 자리한다. 각 거리에는 실크, 대나무, 보석 등을 전문으로 파는 상점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낮은 담벼락 너머로 쌀국수 냄새가 퍼지고, 작은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베트남어 노랫말과 외국인을 위한 영어 간판이 교차해 세월의 결을 느낄 수 있다. 오래된 골목 어귀에서 하노이 명물 시클로(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를 타고 천천히 달려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을 남긴다. 움직임이 느려질수록 하노이의 매력은 또렷해진다. 자연스레 찾아오는 사색의 시간은 이 도시가 가진 깊이와 여운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 바삐 움직이는 세상과 조금은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생각과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다.
하노이 커피 문화도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베트남은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 유입된 커피 문화를 독특하게 발전시켰다. 연유커피는 기본이고, 노란 달걀 거품이 올라간 에그커피는 하노이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커피다. 구시가지의 작은 골목 카페에서 마시는 에그커피는 음료라기보다 하나의 풍경이다. 거품을 스푼으로 천천히 저으면서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시간도 사탕처럼 녹아내린다.
역사에 관심 있다면 호찌민 묘소에 들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찌민은 베트남 국민에게 신화 같은 존재다. 1975년 통일 이전 북베트남 주석이었던 그는 지금도 ‘박 호(호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존경받는다. 묘소 외에도 호찌민 생가, 하노이 문묘, 한기둥 사원 같은 역사적 건축물은 그 자체로 베트남 정신과 혼을 보여준다. 특히 문묘는 11세기 세워진 유교 사원으로, 베트남 최초 대학이기도 했다. 중국과 유교의 영향을 받은 듯하면서도 다른 결을 가진 베트남 고유의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맥주 부르는, 고수 얹은 분짜 일품
낮의 하노이가 ‘시간의 기억’이라면, 밤의 하노이는 ‘감각의 향연’이다. 호안끼엠 호수 주변에서는 주말마다 야시장과 공연이 열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바삭하게 구운 반미(베트남식 바게트 샌드위치)는 고소하고, 고수를 듬뿍 얹은 분짜(돼지고기와 쌀국수, 각종 채소를 느억맘 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는 향긋하며, 숯불에서 구워 내는 닭꼬치와 돼지고기 구이 넴 느엉은 맥주를 부르는 맛이다. 노점의 작은 의자에 앉아 찬 얼음을 동동 띄운 비아 하노이나 사이공 맥주를 곁들이면 무더운 밤공기 속에서도 입안 가득 청량감이 터진다.
하노이는 작지만 단단한 도시다. 천천히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곳이다. 차분한 정취와 역사의 잔향,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살아 있는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아시아와 유럽의 기운이 겹치고,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뒤섞인 하노이. 우리가 잊고 있던 ‘느림’이라는 감각을 되살리기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도시는 없다. 하노이는 언제나 조용히 기다린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선 뒤 잊고 지냈던 느림의 미학을 다시 품게 하는 그런 모습으로.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Credit Info 재이 여행작가 제공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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