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는 한 도시 안에 여러 겹의 시간이 포개져 있는 곳이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진출하면서 조계지(19세기 후반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가 들어섰고, 그 무렵부터 이곳은 중국 근대사 무대이자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떠올랐다. 상하이를 여행한다는 건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걷는 일에 가깝다. 오래된 담벼락을 따라 걷다 뜻밖에 최첨단 세계와 마주치고, 빛나는 마천루를 올려다보다 문득 과거 숨결에 발길이 붙들린다.
낡음과 새로움, 퇴락과 번영 공존
상하이 도심을 걷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을 자주 경험한다. 황푸강을 따라 늘어선 와이탄(外滩)의 서양식 건축물들은 햇살을 머금은 돔 지붕과 기둥식 외벽이 우아한 실루엣을 드러낸다. 100년 전 흑백사진 속 인물들이 당장이라도 그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정적이 감돈다. 불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푸둥 마천루들과 마주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시간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아무도 없는 계단을 톡톡 내려가는 발소리가 오래된 필름 속 장면처럼 느리게, 유난히도 선명하게 울린다. 휴대전화 벨소리도 닿지 않는 정적 속에서 도시의 속도와는 전혀 다른 리듬이 문득 호흡까지 멈추게 만든다.
상하이는 이렇게 빠르게 질주하는 일상 속에 묘한 시간의 층위를 지닌 도시다. 낡음과 새로움, 동양과 서양, 퇴락과 번영이 공존한다. 마치 한 도시가 여러 개 얼굴을 가진 듯한 기시감. 그래서 이곳을 여행할 때면 늘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상하이의 부귀영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와이탄’이다. 황푸강을 따라 정연하게 늘어선 유럽식 건물들은 19세기 서구 열강이 중국에 진출하던 시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금융기관과 무역회사, 클럽, 호텔이던 곳이 지금은 박물관이나 레스토랑, 고급 브랜드 매장 등으로 탈바꿈해 여전히 생생한 얼굴을 보여준다. 강 너머 푸둥 신구에는 마천루가 숲처럼 솟아 있고, 그 반대편 와이탄에는 100년 넘은 건축물들이 묵직하게 버티고 있다. 과거와 현재, 구세계와 신세계가 서로를 바라보는 풍경. 이 대비야말로 상하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와이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천지(新天地)라는 문화거리가 있다. 1920~1930년대 상하이 주택 양식인 스쿠먼(石庫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거리에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 갤러리와 부티크들이 들어서 있다. 한때는 노동자의 공동주택이었고 문화대혁명기를 지나면서 쇠락했던 지역이 지금은 젊은이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변모했다. 골목을 구석구석 걷다 보면 검은 벽돌과 붉은 문틀 사이로 오래된 벽시계나 나무 난간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신천지 근처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우던 이들의 숨결이 서린 이곳은 화려한 상하이에서 또 다른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흑백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프랑스 조계지
상하이에서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곳은 ‘프랑스 조계지’다. 일제히 고개를 숙인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붉은 벽돌 고택, 앤티크 가게, 오래된 베이커리가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하이 속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의 흔적이 짙지만, 어딘가 조용하고 느린 기운이 도시의 여느 구역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과거 이곳은 프랑스인과 상류층 중국인이 사는 고급 주거지였다. 지금은 낡고 작은 가게 안에서 차를 팔고, 골동품을 팔고, 오래된 라디오를 고치는 풍경이 마치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상하이 속 ‘파리’로 불리는 프랑스 조계지. GETTYIMAGES
하지만 상하이가 과거 기억에만 머물고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다면 오해다. 오히려 이곳은 과거를 품은 채 미래로 달려가는 도시다. 푸둥 루자쭈이 금융지구에는 미래 도시처럼 생긴 초고층 빌딩이 경쟁하듯 솟아 있다. 상하이 타워, 동방명주, 진마오 타워 같은 마천루가 제각각 그림자를 드리우며 황푸강을 감싸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상하이 전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다. 이 도시가 얼마나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하이는 미식 도시다.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특징이다. 달콤하고 짭조름한 상하이식 ‘소룡포(샤오롱바오)’와 부드럽고 촉촉한 상하이식 붉은 양념 돼지고기 ‘홍샤오로우’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특히 신천지 주변에 자리한 세련된 레스토랑과 노포에서는 이 전통 요리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상하이는 ‘중국의 얼굴’이자 ‘세계의 거울’과도 같은 도시다. 중국이 꿈꾸는 미래와 19세기 열강의 그림자가 동시에 어른거리는 도시. 복잡하고 겹겹이 얽혀 있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새로움’보다 ‘지켜낸 것’에 마음이 더 머무른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 기억에 남는 건 ‘풍경’보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상하이가 바로 그런 도시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Credit Info 재이 여행작가 제공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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