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뉴욕이나 런던을 방문해 영화에 나온 장소를 실제로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이제 서울도 그런 도시가 됐다. 서울 사람뿐만 아니라 외국 여행객들도 K-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한강, 청계천 등을 방문해 기념사진을 남기곤 한다.
어릴 적 처음 본 TV 속 세계는 나를 매료시켰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환호하게 만들고, 때로는 온 동네가 떠나가라 응원하게 만드는 세계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저녁이면 동네에 몇 안 되는 TV가 있는 친구 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세계를 들여다봤다. 부모님은 ‘바보상자’라 부르며 그런 나를 혼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TV에 대한 내 짝사랑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TV 키드로 살던 내가 어느 날 ‘평론가’라는 이름을 달고 TV 속에 등장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세상 참 요지경이구나” 하셨다.
어쩌다 보니 TV를 통해 세상을 오래도록 보게 된 내게 서울은 갖가지 콘텐츠의 스토리가 어우러진 공간이 됐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서울의 어떤 곳에서도 직업병처럼 어떤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던 장면들이 오버랩되곤 한다. 한번은 경복궁역 근처 서촌에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대학생이던 딸은 서촌이 요즘 ‘힙 플레이스’라고 했다.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슬슬 동네를 둘러보며 걷다가 문득 익숙한 집이 눈에 띄었다. 수성동계곡 근처에 있는 연립주택이었는데, 보자마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왔던 곳이라는 게 떠올랐다. 서울에 입성한 삼 남매가 살게 된 집이 바로 그 연립주택이었다 .
이런 식이다. 다양한 K-콘텐츠의 팝업 스토어가 열려 K-콘텐츠 팬들의 성지로 불리는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가면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떠오른다. 그곳은 드라마 속 홍해인(김지원)이 대표를 맡고 있는 퀸즈 백화점의 배경으로 나왔다. 그래서 곳곳에 홍해인과 그를 사랑하는 백현우(김수현)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가 묻어난다. 특히 이 백화점의 실내 정원에 들어서면 백현우가 첫눈을 함께 맞고 싶다는 홍해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이벤트로 인공눈을 흩뿌려준 장면이 생각난다.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내와 함께 찾아가 <눈물의 여왕> 이야기를 해주면 한껏 달달해지지 않을까 싶다. 비록 인공눈은 못 날리더라도.
청계천 세운상가를 지나다 보면 앞쪽에 광장처럼 펼쳐진 공간이 등장한다. 드라마 <빈센조>의 배경이 된 곳이다. 주민들이 모여 파티를 벌이기도 했던 그곳에서는 드라마 특유의 누아르적 분위기를 풍기며 이곳을 노리는 적들과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마찬가지다. <빈센조>의 마지막 회 엔딩에 등장한 그곳은 극 중 빈센조 역할을 연기한 송중기가 마치 런웨이를 걷듯 멋지게 걷는 장면이 연출된 곳이다. 야외 계단 입구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그래서 마치 송중기라도 되는 듯, 시상식에 가는 듯한 포즈를 취하게 된다.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은 말 그대로 K-콘텐츠의 스토리가 곳곳에서 피어나는 K-콘텐츠 맛집 공간이다. 한강대교 아래에 서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 속 괴물이 금세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고, 장마철 멀리 보이는 밤섬에 물이라도 차오르면 영화 <김씨표류기>에서 표류됐던 남자가 괜스레 걱정된다. 최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노들섬에 가면 방탄소년단이 ‘Run’ 뮤직비디오에서 달려가던 광경이 떠올라 안 하던 달리기를 하고 싶어지고, 한강을 유유히 흘러가는 유람선을 보며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영준(박서준)이 미소(박민영)의 퇴직 선물로 불꽃놀이를 함께 보던 장면을 떠올린다. 한강과 유람선과 불꽃놀이의 향연이라니. 없던 연애 감정도 생겨날 법한 설렘을 주는 곳이 아닌가. 내게 한강은 그런 곳이다.
남산은 또 어떤가. 사실 내게 남산은 주로 옛 추억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서울로 유학 와서 엄마 손 잡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갔던 곳이고,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던 곳이며, 대학 시절에는 그 유명하다는 돈가스를 먹고 데이트를 했던 곳이다. 그런데 내 서울살이의 삶이 묻어난, 익숙한 그곳에도 갖가지 콘텐츠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국민 예능’으로 불린 <무한도전>에서 그토록 많은 추격전이 펼쳐졌던 곳이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김삼순(김선아)과 현진헌(현빈)이 티격태격하며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던 곳이며, 무수한 로맨스를 담은 콘텐츠 속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던 곳이 됐다. 남산서울타워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에 가면 찾아야 할 1순위 명소였다. 그러다가 1985년 여의도에 63빌딩이 세워지면서 그곳 전망대가 새롭게 부상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롯데월드타워 전망대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상징하는 이 전망대들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셈인데, 워낙 스펙터클한 공간적 특징 때문인지 이 마천루들도 K-콘텐츠의 단골 배경이 되곤 했다. 63빌딩은 <오징어 게임>의 장소가 서울 여의도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등장했고, 롯데월드타워는 <신과 함께-죄와 벌> 편에 원귀가 되어 이승을 떠도는 수홍(김동욱)과 저승사자 강림(하정우)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벌이는 격투 신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최근 서울 도심을 걷다 보면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을 만난다. 이제 그들이 찾는 곳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유명 관광지만이 아니다. 물론 여전히 저 멀리 높은 빌딩과 고궁이 겹쳐져 과거와 현대가 한 프레임 안에 중첩되는 그곳은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서울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기에 ‘콘텐츠’라는 새로운 매력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 주목을 받은 후 기훈(이정재)과 일남(오영수)이 생라면에 소주를 마신 쌍문동의 평범한 편의점이나 기훈이 처음 양복 입은 남자(공유)와 딱지치기를 했던 양재 시민의숲 지하철역에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을 배출한 하이브 사옥을 찾아가 인증 사진을 찍고, 그들이 연습생 시절 자주 갔던 음식점을 찾아가 그 메뉴를 체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K-콘텐츠라는 프리즘을 통해 서울을 보는 건 이제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더 이상 아닌 시대가 됐다.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그 대열에 함께한다. 언젠가 서울에 올라오신 부모님과 함께 롯데월드타워 전망대를 구경하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자 부모님은 또 말씀하셨다. “세상 참 요지경이구나.”
글.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MBC 시청자 평가원과J TBC 시청자위원을 맡았고, 백상예술대상 심사위원이다.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등의 저서가 있다.
Credit Info 제공 서울사랑(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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